묵묵히 제 길을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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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묵히 제 길을 가기

길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 도대체 우리가 어디를 향해 걷는지가 왜 중요하지 않겠는가.
다만 길의 끝에서 나부끼는 깃발, 종착지에 대한 거창한 소문들이 지금의 걸음걸이를 얼마나 망쳐 놓았는지 알 것 같다.
급작스레 찾아온 노안처럼 먼 데를 보다가 정작 가까운 곳이 보이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먼 데 소문에 귀를 기울이느라 옆에서 소매를 붙들고 말 건네는 존재가 있었음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하지만 희망도 절망도 없이 걷는 것은 얼마나 힘든가.
루쉰의 글 '희망'의 어느 대목을 읽다 한참을 머물렀다.
헝가리 혁명 시인 페퇴피 산도르의 시를 인용하면서 달아 놓은 구절 하나.

“참혹한 인생이여!
페퇴피처럼 용감한 사람도 어둔 밤을 마주하여 걸음을 멈추고 아득한 동쪽을 돌아보았다.”

아, 용감한 시인도 캄캄한 밤길을 걷다 동쪽으로 고개를 돌렸구나.
사람을 홀려 청춘을 앗아간다고 ‘희망’을 욕했던 시인도 한번은 해 뜨는 쪽을 보았던 것이다.
그래도 그는 어둔 동쪽 하늘에 절망하지 않았다.
“절망이 허망한 것은 희망이 그런 것과 같으니.”

그처럼 묵묵하진 못했지만 세상에 진정 캄캄한 길이 없다는 것은 알 것 같다.
길은 절망한 사람들에게만 캄캄하다. 숨을 깊이 마시고 정면을 주시하면 어둠은 옅어진다.
천천히 걷다 보면 길이 조금 보이고, 보이는 만큼 걸어가 보면 또 그만큼이 열린다.
이렇게 말하면서도, 게다가 그리 어둡지도 않은 길을 걸으면서도 내 가벼운 고개는 지금도 여전히 동쪽으로 돌아간다.
부디, 내 안의 영리함이 헛된 희망을 꾸며내지 않기를.
부디, 내 안의 바보가 묵묵히 제 길을 가기를!


>등록일 < - 2020/05/20
>출 처

<- 좋은글> 中에서-
>이미지 출처 < - 무료이미지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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