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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률 스님의 행복]
인생에는 정답이 없습니다.
자기가 선택한 대로 사는 것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럴까 저럴까 망설이는 것은
선택에 대한 책임을 지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
우리는 보통 내가 원하는 대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되는 게 행복이고 자유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내가 원한다고 다 되는 것도 아닙니다.
객관적인 상황이
그렇게 될 때도 있고 그렇게 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따라서 외적인 조건과 상황에 따라
행복하기도 하고 불행하기도 한 행복은 기껏해야 반쪽짜리에 불과합니다.
가을걷이를 마친 황량한 겨울 들판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 같지만
다시 봄이 오고 날씨가 따뜻해지면 파릇파릇 싹이 터요.
싹이 텄다는 건 아무것도 없을 것 같았던 밭에
사실은 씨앗이 있었다는 얘기잖아요.
내 가슴에 못이 박히면 내가 깨닫고 뉘우치면 되는데,
남의 가슴에 못을 박는 말을 하면
내가 참회하고 뉘우친다고 소멸되지 않습니다.
내가 상대방 만나기를 꺼려하니까
스스로 그 사람을 만날 자유를 잃어버리는 겁니다.
미움이라는 것은 상대를 만나기 싫다는 말이기 때문에
‘나는" 그곳에 가지 않겠으니 너도 이곳에 오지 마라’는 출입금지와 같아요.
결국 미워하는 마음을 갖지 않아야 이 세상 어디라도 자유롭게 갈 수 있고,
누구라도 편하게 만날 수 있는데,
우리는 우리 자신을 자꾸 감옥으로 몰아넣습니다.
세상에 나를 괴롭히는 사람,
고통에 빠뜨리는 사람,
불안하게 하는 사람이 따로 없습니다.
내가 과거의 나쁜 기억을 놓지 않고
마음속 깊은 곳에 품고 있어서 생긴 문제예요
그것을 자각하는 데서 상처가 치유되기 시작합니다.
열등감과 우월감은 뿌리가 같습니다.
모두 삶의 기준을 타인에 두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우리가 사람을 만날 때 작용하는 심리가 있습니다.
누군가를 처음 만날 때 우리는
‘상대"와 나는 다르다’는 전제로 시작합니다.
그래서 처음엔 경계하고 탐색해요.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나누다 공통점을 하나둘 발견하면
“나하고 생각이 같네”
“나하고 고향이 같네”
“나하고 성이 같네”
하면서 반가워하고 금방 친해지지요.
그래서 친구가 되기도 하고, 애인이 되기도 하고, 동료가 되기도 합니다.
그렇게 일단 가까워지면 ‘서로 다르다’는 전제가 ‘우리는 같다’는 전제로 바뀝니다.
그러면 비로소 관계가 단단해진 것 같지만
사실 그때부터 갈등이 시작됩니다.
산에 어디를 둘러봐도 베어다가 바로 기둥으로
쓰기에 좋은 나무는 없습니다.
아무리 튼튼하고 색깔이 좋아도 손질하고 다듬어야 사용할 수 있어요.
그러니 잘 맞추어 같이 지내볼 생각을 하면 누구와도 인연을 맺을 수 있지만,
한눈에 딱 맞는 사람을 찾으면 천하를 둘러봐도 찾기가 어렵습니다.
인생을 살 때 자신의 능력이 100이라면
바깥에 알릴 때는 아무리 많아도 80쯤만 알리는 게 좋습니다
이것이 인생을 편안하게 사는 길이에요.
만약에 내 능력이 100인데 바깥에 50으로 알려져 있으면
나를 욕하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행복이란 결국 다른 사람의 불행 위에 서 있습니다.
내가 시험에 합격했다고 기뻐할 때 누군가는 불합격의 쓴맛을 봐요.
내가 선거에 이겼다고 기쁨을 누릴 때 누군가는 낙선하고 절망에 빠져 있습니다
내가 경쟁 입찰에 낙찰을 받았다고 즐거워할
때 누군가는 낙찰을 못 받아 뒷수습 문제로 골치가 아플 거예요.
인생을 행복하게 사는 것이 돈과 출세보다도
더 중요하다면 두려울 게 없어야 합니다.
이때 어느 정도 손실과 비난은 감수해야 해요.
그런데 그게 잘 안 되지요.
대체로 도중에 포기하고 맙니다.
그건 자기 삶의 원칙이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에요
꽃은 벌에게 꿀을 주고,
벌은 꽃가를 옮겨 꽃이 열매를 맺게 해주잖아요.
이렇게 너도 좋고 나도 좋은 삶을 살아야 합니다.
희생이라는 생각 없이
남을 돕는 게 나에게도 좋을 때 함께 행복해지는 길을 가는 겁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온갖 일이 다 생겨요.
사람이 죽기도 하고 파산하여
모든 돈을 잃기도 하고 엄청나게 배려해줬는데 뒤통수를 맞기도 합니다.
그러나 저절로 일어나는 일은 아무것도 없어요.
그렇다고 신의 뜻도 아니고 전생의 죄 때문도 아니고
우연히 일어난 일도 아니에요.
단지 내가 그 일의 원인을 모를 뿐입니다.
우리는 흔히 ‘이것은 옳고 저것은 틀리다’
‘나는 맞고 너는 그르다’는 분별의 관점으로 세상을 봅니다.
그래서 늘 시시비비에 끌려다니고 자꾸 경계를 지어서
스스로를 답답하게 묶어놓지요.
그런데 화단에 피어 있는 꽃들을 보세요.
형형색색으로 예쁘게 피어 있는 꽃들은 서로의 아름다움을
시비하거나 경쟁하지 않습니다.
각종 분쟁이 일어나기까지 비극의 씨앗이
언제 뿌려졌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드러난 현상만 가지고
상대를 단죄하려는 것은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데 도움이 안 된다는 사실이에요.
진정한 평화는 상대의 고유성과 특성을 이해하고 인정할 때 찾아옵니다.
코끼리는 복이 많아서 덩치가 크고
쥐는 죄가 많아서 작게 태어난 것이 아니에요.
자연에는 불평등이 없습니다.
뱀이 개구리를 잡아먹는다고 개구리는 잘못 태어나고
뱀이 더 좋게 태어난 게 아니에요. 종이 다를 뿐이에요
먹을 게 필요한 사람에게 밥 한 끼를 나누어주고,
옷이 필요한 사람에게 남는 옷을 내어주고,
넘어진 아이를 일으켜 세워주는 것도 모두 나눔입니다
이렇게 작은 나눔을 실천하다보면
내어주는 것보다 얻는 게 훨씬 더 많아요.
법률스인의 행 책 중에서 --
인생에는 정답이 없습니다.
자기가 선택한 대로 사는 것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럴까 저럴까 망설이는 것은
선택에 대한 책임을 지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
우리는 보통 내가 원하는 대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되는 게 행복이고 자유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내가 원한다고 다 되는 것도 아닙니다.
객관적인 상황이
그렇게 될 때도 있고 그렇게 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따라서 외적인 조건과 상황에 따라
행복하기도 하고 불행하기도 한 행복은 기껏해야 반쪽짜리에 불과합니다.
가을걷이를 마친 황량한 겨울 들판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 같지만
다시 봄이 오고 날씨가 따뜻해지면 파릇파릇 싹이 터요.
싹이 텄다는 건 아무것도 없을 것 같았던 밭에
사실은 씨앗이 있었다는 얘기잖아요.
내 가슴에 못이 박히면 내가 깨닫고 뉘우치면 되는데,
남의 가슴에 못을 박는 말을 하면
내가 참회하고 뉘우친다고 소멸되지 않습니다.
내가 상대방 만나기를 꺼려하니까
스스로 그 사람을 만날 자유를 잃어버리는 겁니다.
미움이라는 것은 상대를 만나기 싫다는 말이기 때문에
‘나는" 그곳에 가지 않겠으니 너도 이곳에 오지 마라’는 출입금지와 같아요.
결국 미워하는 마음을 갖지 않아야 이 세상 어디라도 자유롭게 갈 수 있고,
누구라도 편하게 만날 수 있는데,
우리는 우리 자신을 자꾸 감옥으로 몰아넣습니다.
세상에 나를 괴롭히는 사람,
고통에 빠뜨리는 사람,
불안하게 하는 사람이 따로 없습니다.
내가 과거의 나쁜 기억을 놓지 않고
마음속 깊은 곳에 품고 있어서 생긴 문제예요
그것을 자각하는 데서 상처가 치유되기 시작합니다.
열등감과 우월감은 뿌리가 같습니다.
모두 삶의 기준을 타인에 두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우리가 사람을 만날 때 작용하는 심리가 있습니다.
누군가를 처음 만날 때 우리는
‘상대"와 나는 다르다’는 전제로 시작합니다.
그래서 처음엔 경계하고 탐색해요.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나누다 공통점을 하나둘 발견하면
“나하고 생각이 같네”
“나하고 고향이 같네”
“나하고 성이 같네”
하면서 반가워하고 금방 친해지지요.
그래서 친구가 되기도 하고, 애인이 되기도 하고, 동료가 되기도 합니다.
그렇게 일단 가까워지면 ‘서로 다르다’는 전제가 ‘우리는 같다’는 전제로 바뀝니다.
그러면 비로소 관계가 단단해진 것 같지만
사실 그때부터 갈등이 시작됩니다.
산에 어디를 둘러봐도 베어다가 바로 기둥으로
쓰기에 좋은 나무는 없습니다.
아무리 튼튼하고 색깔이 좋아도 손질하고 다듬어야 사용할 수 있어요.
그러니 잘 맞추어 같이 지내볼 생각을 하면 누구와도 인연을 맺을 수 있지만,
한눈에 딱 맞는 사람을 찾으면 천하를 둘러봐도 찾기가 어렵습니다.
인생을 살 때 자신의 능력이 100이라면
바깥에 알릴 때는 아무리 많아도 80쯤만 알리는 게 좋습니다
이것이 인생을 편안하게 사는 길이에요.
만약에 내 능력이 100인데 바깥에 50으로 알려져 있으면
나를 욕하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행복이란 결국 다른 사람의 불행 위에 서 있습니다.
내가 시험에 합격했다고 기뻐할 때 누군가는 불합격의 쓴맛을 봐요.
내가 선거에 이겼다고 기쁨을 누릴 때 누군가는 낙선하고 절망에 빠져 있습니다
내가 경쟁 입찰에 낙찰을 받았다고 즐거워할
때 누군가는 낙찰을 못 받아 뒷수습 문제로 골치가 아플 거예요.
인생을 행복하게 사는 것이 돈과 출세보다도
더 중요하다면 두려울 게 없어야 합니다.
이때 어느 정도 손실과 비난은 감수해야 해요.
그런데 그게 잘 안 되지요.
대체로 도중에 포기하고 맙니다.
그건 자기 삶의 원칙이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에요
꽃은 벌에게 꿀을 주고,
벌은 꽃가를 옮겨 꽃이 열매를 맺게 해주잖아요.
이렇게 너도 좋고 나도 좋은 삶을 살아야 합니다.
희생이라는 생각 없이
남을 돕는 게 나에게도 좋을 때 함께 행복해지는 길을 가는 겁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온갖 일이 다 생겨요.
사람이 죽기도 하고 파산하여
모든 돈을 잃기도 하고 엄청나게 배려해줬는데 뒤통수를 맞기도 합니다.
그러나 저절로 일어나는 일은 아무것도 없어요.
그렇다고 신의 뜻도 아니고 전생의 죄 때문도 아니고
우연히 일어난 일도 아니에요.
단지 내가 그 일의 원인을 모를 뿐입니다.
우리는 흔히 ‘이것은 옳고 저것은 틀리다’
‘나는 맞고 너는 그르다’는 분별의 관점으로 세상을 봅니다.
그래서 늘 시시비비에 끌려다니고 자꾸 경계를 지어서
스스로를 답답하게 묶어놓지요.
그런데 화단에 피어 있는 꽃들을 보세요.
형형색색으로 예쁘게 피어 있는 꽃들은 서로의 아름다움을
시비하거나 경쟁하지 않습니다.
각종 분쟁이 일어나기까지 비극의 씨앗이
언제 뿌려졌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드러난 현상만 가지고
상대를 단죄하려는 것은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데 도움이 안 된다는 사실이에요.
진정한 평화는 상대의 고유성과 특성을 이해하고 인정할 때 찾아옵니다.
코끼리는 복이 많아서 덩치가 크고
쥐는 죄가 많아서 작게 태어난 것이 아니에요.
자연에는 불평등이 없습니다.
뱀이 개구리를 잡아먹는다고 개구리는 잘못 태어나고
뱀이 더 좋게 태어난 게 아니에요. 종이 다를 뿐이에요
먹을 게 필요한 사람에게 밥 한 끼를 나누어주고,
옷이 필요한 사람에게 남는 옷을 내어주고,
넘어진 아이를 일으켜 세워주는 것도 모두 나눔입니다
이렇게 작은 나눔을 실천하다보면
내어주는 것보다 얻는 게 훨씬 더 많아요.
법률스인의 행 책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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